단상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목운 2019. 9. 15. 07:37

추석날 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아내와 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세 받는 작가가 되는 포부를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아내는 주변 평이 좋으니 번역만 하지 말고 '내 글'을 쓰라는 주문입니다. 같은 권고는 친구한테도 들은 바 있습니다.

제 답은 아직 내 글 쓸 실력은 안 되고 당분간 시간 활용 겸 취미 생활로 수준 높은 책을 골라 번역하는 일을 더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가 예술이 되는 이유는 김연아나 조성진처럼 같은 훈련을 쉬지 않고 닦아서 그야말로 춤을 추는 경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침 에카르트 님의 '영성 지도(The Talks of Instruction)'를 보면, 세상에서 떨어져 신에게 몰입하고 그 상태에서 세상일을 하는 경지에 가기 위해 글쓰기 훈련을 예로 든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이 일이 지난한 일이며 그야말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경지를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면 이미지도 필요없고 암기도 필요없이 자유롭게 저절로 쓰게 되는 경지가 온다고 합니다. 또 이것은 바이올린 연주자에게도 통하는 얘기라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일을 기술(skill)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중용의 '중'으로, 또 세상에 대한 집착없이 중의 정신으로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하는 것은 '화'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비약처럼 느끼실지 모르지만 이 점은 왕양명이 명상수행을 설명하길, 자기 의념을 알아차릴 필요없이, 즉 반성의식 없이 저절로 천리가 보존되는 성현의 경지까지 가기 위해, 반성의식을 써서 천리를 보존하는 군자의 경지를 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에 대응한다고 봅니다(정은해의 유교명상론, 504~508쪽).

요컨대 제 글쓰기는 제 수행공부의 결과이자 그림자가 되길 바라는 것이고 앞글에서 중과 화의 실천을 아주 간략히 보여드렸지만 그 실천에는 예술가 및 스포츠맨과 같은 훈련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절정에 이르러 저절로 '화(和)'가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 또는 크고작은 모든 일상사에서 신의 뜻이 이뤄지도록 수행하자는 게 제가 파악한 동서 영성의 공통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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