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 4

목운 2019. 12. 5. 08:18

영혼 안에 신의 탄생

 

에크하르트의 저술에는 신의 현존 인식 안으로 인간이 '돌파해 들어감(breakthrough)'이 영혼 안에 신의 탄생이란 비유로 나타난다. 이것은 멋진 장치이며 위에 든 모상 비유와 함께 뚜렷이 형이상학적이고 지적인 그의 감각을 그리스도교 전통 교리와 결합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우선 물론 탄생의 개념이 역사적인 육화, 즉 시공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교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삼위 안에서의 성자의 탄생 또는 출산을 가리킨다. 참으로 인간 영혼 안에서 성자의 탄생 주장은 우리가 삼위에로 돌아갈 가능성을 묘사하는 데 기여하는데 그리스도교 신학에 따르면 우리는 애초에 삼위에게서 나왔다. 그리하여 그것은 성부로서 삼위 안에서 성자를 낳고 또 같은 성부로서 인간 영혼의 심연에서 동일한 성자를 낳는 신과 내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모상이 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탄생 비유는 또 인간과 신성 간의 합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게 있다. 성자는 종종 '말씀'이라 말해지며 에크하르트는 영혼 안에서의 신의 탄생은 영혼의 근저에서 신이 그 말씀을 내놓는다고 한다. 영혼의 근저란 '지성'인데 말씀(성자)이 성부에 의해 발해지고 삼위 안에서 성부의 '모상'인 것과 똑같이 우리 안에 있는 신의 '모상'이다. 이제 '말씀'과 '모상'은 모두가 '내적으로 있으면서',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똑같은 성질을 가진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과 '모상'은 모두 신적-영적-지성적-통합된 영역에 속한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탄생의 비유를 '말씀'과 '모상' 같은 용어로 특별하게 다룸으로써 탄생이란 특색이 그 자체 지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탄생'과 '지성'을 묶는 데 성공하는데 이런 것들은 그가 초월성에 대해 사용하는 두 가지 중요한 표상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신의 탄생이 변화된 존재상태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된 '앎'의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우리 안에서 신의 탄생 비유는 에크하르트 체계 내에서 중심을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의 사고 내에서 많은 다양한 갈래에 대해서 동일한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에서 존재와 앎이 하나가 되듯이 초월성과 내재성이 하나가 되고 개인의 내면성이라는 주관적 차원이 그리스도교 교의라는 객관적 차원과 결합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더 나아간 원칙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윤리와 도덕 원칙이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자연적이고 훈련되지 않은 자'가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반면 '신 안에 걷는 자'들만이 이 탄생을 이해할 수 일다고 말한다. 그 탄생을 통해서 우리는 '신처럼' 되고 거룩하게 되며 덕 안에 자리잡는다. 이것을 은총에 대한 스콜라 철학과 교부들 가르침에 대한 변형으로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은총이란 우리 안에 신적 도덕을 확립하는 신의 자유로운 활동이며 그로써 우리는 점차 신의 본성에 맞추어진다.

 

은총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는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정점에 이르렀는데 영혼의 탄생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이 논의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탄생의 비유에서 파리대학 교수인 에크하르트는 은총을 신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소통으로, 말하자면 인간과 신의 초월적 일치로 본다는 생각을 강하게 진술한다. 그는 언제나 '창조된' 은총이라는 게 신의 활동을 유한한 것들의 세상으로 밀어내는 매우 정통적 개념을 비웃었으며 반면 그에게 신의 본성은 그 자체 (탄생으로서) 순수한 하나의 활동이며 따라서 창조되지 않고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었다.

 

탄생의 비유를 은총에 관한 신비적 신학으로 본다면 여러가지 돌출점이 생긴다. 첫째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신의 합일에 기초하기 때문에 신비적이다. 둘째 은총이란 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정도라는 것을 강조한다. 은총의 절박함과 풍요함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신의 본성에서 나오는 결과인데 그것을 그토록 대단하게 파악한 신학자가 거의 없다. 에크하르트는 신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탄생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그것은 이것이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탄생에서 오는 영적 혜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자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우리의 피조물성이라는 진정한 실체가 무(無)임에도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신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