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목운 2019. 9. 3. 07:33

저 책을 읽고 평소 제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물론 제 생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말씀드리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두 계명, 즉 신애와 인인애(이웃 사랑)의 실천방법을 잘 모릅니다. 제가 보고 겪은 바로는 인인애로써 신애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교회 잘 출석하고 말 잘 듣는 것으로 신애를 실천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정하려면 2천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학습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신비적 실천이라 함은 먼저 신애에서 만렙까지 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세상이 요청하는 인인애를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 노선은 상구보리가 하화중생에 우선한다고 보는 불교적 방법과 화(和)를 실천하기 위해 정좌해서 허령지각과 먼저 친해져야 한다(中의 실천)는 유교적 방법과 실천적으로 동일합니다.

인상 깊게 하려고 만렙이란 말을 썼는데 요컨대 이거 하나 파면 이승과 다음 생 문제를 올바로 꿴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때 국영수, 심지어 영어 하나만 확실히 파도 우리나라에서 그럭저럭 많은 문제가 풀린다는 게 제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양승태, 한 사람만 봐도 압니다.

정답은 역시 '마음과 뜻과 정성(and/or 목숨, 힘)을 다해 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바탕에서 이웃 사랑의 지혜와 실천력을 구하지 않기에 수많은 구호단체와 종교단체의 타락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흉내내어 감히 모든 유교 경전을 요약하면 '윤집궐중'입니다. 여기서 중은 중용이 말하는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허령지각 또는 탄허스님 말씀대로 천리라 봅니다. 중용은 이 '중'이 '천하지대본'이라 합니다. 실천적으로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주희는 하다하다 궁하여 결국 '상제'를 끌어들였죠!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원고를 받으신 분은 아시게 되겠지만 신애의 실천 또는 윤집궐중의 실천은 바로 영적 독서(lectio divina)와 관조 또는 묵상(contemplation)을 쉬지 않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바오로 말씀의 취지입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하심(下心, letting go)이 있습니다. 이 비결만이 국영수 만렙추구의 한계를 돌파해 줄 것입니다.

※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원고 파일을 받아 보실 분은 메신저 기타 방법으로 이메일 알려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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