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그리스도교 신비가

목운 2019. 7. 13. 06:15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을 마쳤습니다. 저자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일단 객관적으로 들여다 본다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메시지를 조금 소개해보면 쉽게 얘기해서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교회 잘 출석해서 예식에 참여하고 기도를 바치는 사람인 반면, 그리스도교 신비가라면 관조의 생활(contemplation)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이 말의 어원에 점을 친다는 뜻이 있었으나 기독교에서 쓰이면서 그 뜻이 배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주역이 떠올랐습니다. 역경의 원래 취지는 생각도 없고 행위함도 없이(無思也 無爲也) 고요한(寂然不動) 신의 경지에 맞춰 살고자 하는 것인데 오히려 점술로 이해하는 속인이 많은 것과 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요점을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란 신의 현존체험을 고취하기 위해 신에게 몰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가 요약한 두 가지 계명 가운데 신애(神爱)의 실천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다른 모든 행이 신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되도록 하자는 영성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요점이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중을 잡고(允執厥中) 그 정신으로 모든 덕을 닦는(和) 중용의 정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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