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고통과 역경에 대한 태도

목운 2020. 9. 8. 08:41

수행으로서의 독서에 신적(divina)이란 형용사를 붙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독서에는 기술을 습득하거나 처세를 잘 하기 위한 독서가 있을 테고 많은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치기 위한 독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서는 그저 다다익선이라는 데 그치거나 통속과 자기 과시 등 에고에 복무하기 일쑤입니다.

신적 독서 또는 영적 독서는 존재의 근본 진실을 파악하여 정의에 맞게 또 원만하고 완전하게 세상 삶을 살고 만족스럽게 세상 삶을 마무리하여 더 높은 경지로 무한히 향상해 가려는 높은 이상에 부합하는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진리에 부합하는 삶과, 자연에 새겨진 진화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 수행으로서의 독서이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보다는 삶이나 존재의 변혁과 향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 독서나 경전급 책의 독서는 한 권을 가지고 수십 번을 읽어도 모자라 평생 읽을 수 있는데 에크하르트 같은 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해서 매일 몸에 붙이고 있을 뿐 아니라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반복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버리고 떠나 있음'이란 주제에는 세 개의 독일어 설교가 들어 있는데 제가 요약하기로는 '신인합일에 대한 고찰'이자 진정한 영적 가난을 통해 신과 같아지는 일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다 근원에 다가간 진실들은 당대에 배척받지만 수백년 이상 대를 이어 성현과 학자들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논하고 또 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3-14세기 사람인 에크하르트는 20세기에는 에릭 프롬에 의해 대중적으로 해석되고 널리 읽힌 일도 있습니다. 특별히 영적 가난에 대해서는 무욕, 무지, 무소유를 갖추어야 비로소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라고 하여 동아시아 정신과 깊게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바로 이 영적 가난에 대해서도 '버리고 떠나 있음'이란 주제 밑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나누고 싶은 것은 야고보서 1:17에 대한 강론 첫머리에 나오는 것인데 "신이 베푸는 것은 항상 최상의 것"이기 때문에 "신이 우리에게 내리는 것이나 내리지 않는 것이나, 주는 것이나 주지 않는 것이나 모두 다 우리에게 최상의 것"이라는 것입니다(이부현 선집 206-207쪽). 

신의 작위나 부작위, 심지어 병이나 고통도 모두 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므로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는 신이 최상의 것을 원한다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것을 원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가 신을 사랑한다면 신의 뜻이 우리에게 거의 다 이루어지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더 즐거운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반복하건대 고통과 역경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고 거기에서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위 208쪽). 

같은 쪽에서 에크하르트는 주의 기도의 진정한 의미도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에크하르트는 당시 지배층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많이 하여 고위 성직자이자 최고 지성의 하나였음에도 유일하게 종교재판에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연말까지는 계속 아쉬운 대로 이 책의 요점을 제 나름으로 정리하여 공유할 생각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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