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 6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제 짧은 공부로 이해하자면 성리학의 원조를 주희로 본 것이 혼란과 정체의 원인이지 싶습니다. 그 절정은 송시열이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윤휴를 처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고 선생을 성리학 또는 신유학의 원조로 보면 저런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노력은 15~16세기의 왕양명에 이르러서 겨우 이루어졌습니다. 주희와 왕양명이 갈리는 가장 뚜렷하면서도 심오한 부분은 바로 격물치지의 해석입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식을 극진하게 하는 것을 '치지'로, 마음이 사물의 이치의 극진한 곳에 이르는 것을 '격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양명은 '치지'의 지를 지식이 아닌 양지로 보았습니다. (정은해, 유교 명상론, 440쪽 참조)" 그래서 양명은 '치양지'를 핵심 실천요..

단상 2019.09.25

공부의 네 단계

6년전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제 공부는 은퇴후 공부로서는 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공부는 어쨌든 경쟁사회에서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과거 관성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계속 설파하는 이 공부의 목표는 이 세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보다 몸을 벗은 뒤의 안전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목표인 공부입니다. 즉 "신의 안에 있는 궁극적 의식과 앎이 바로 입니다. 이 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공부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부의 결과 의식이 진화하고 향상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앞 글에 이어 글쓰기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강원국 님이 1,500여 개를 쓰고나서 자신감을 얻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5~6년 동안 7백여 개의 글을 썼으니 앞으로 7~8백개를 더 쓰고 '내 책 쓰기'에 도전할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는 바로 삶의 공부, 특히 유교적 수행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제 글쓰기도 수행의 이면이자 연장선상의 작업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일이 기법(skill)의 수련이라고 본 점에서 에카르트 님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같습니다. 채근담은 달사(達士)라고 했고 영어의 'skillful'에는 깨달은 자란 뜻도 있습니다. 이 일에는 매우 단순한 일의 엄청난 반복이 필요하다는 ..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추석날 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아내와 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세 받는 작가가 되는 포부를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아내는 주변 평이 좋으니 번역만 하지 말고 '내 글'을 쓰라는 주문입니다. 같은 권고는 친구한테도 들은 바 있습니다. 제 답은 아직 내 글 쓸 실력은 안 되고 당분간 시간 활용 겸 취미 생활로 수준 높은 책을 골라 번역하는 일을 더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가 예술이 되는 이유는 김연아나 조성진처럼 같은 훈련을 쉬지 않고 닦아서 그야말로 춤을 추는 경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침 에카르트 님의 '영성 지도(The Talks of Instruction)'를 보면, 세상에서 떨어져 신에게 몰입하고 그 상태에서 세상일을 하는 경지에 가기 위해 글쓰기 훈련을 예..

단상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엊그제 아산병원에서 문상하면서 토론하기를 성리학의 영성은 기독교의 그것과 대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중국이 망한 이유와 같습니다. 중국은 화약을 먼저 개발했고 서구보다 먼저 충분한 화력을 갖출 기술이 있었지만 제국주의적 야욕이 없었고 그 야욕을 종교로 포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부작용 때문에 그 근본정신을 부정하고 내버릴 수 없듯이 동양이 서양 제국주의에 일시적으로 패했다고 해서 성리학(=신유학)의 근본정신을 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벽의 천진암 그룹과 같은 그리스도적 성리학의 실천가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 페이스북 벗이신 분께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을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철저히 공부하..

단상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저 책을 읽고 평소 제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물론 제 생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말씀드리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두 계명, 즉 신애와 인인애(이웃 사랑)의 실천방법을 잘 모릅니다. 제가 보고 겪은 바로는 인인애로써 신애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교회 잘 출석하고 말 잘 듣는 것으로 신애를 실천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정하려면 2천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학습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신비적 실천이라 함은 먼저 신애에서 만렙까지 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세상이 요청하는 인인애를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 노선은 상구보리가 하화중생에 우선한다고 보는 불교적 방법과 화(和)를 실천하기 위해 정좌해서 허령지각과 먼저 친해져야 한다(中의 실천)는 유교적 방법과 실천적으로 동..

단상 2019.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