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유럽의 지적 전통

목운 2019. 12. 9. 08:34

이 복잡한 인물을 찬찬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 지적 생활의 진화에서 그가 결정적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클레멘트 4세가 1267년에 도미니코회로 하여금 여성 종교 공동체에 대한 사목을 맡도록 했는데 그때 비로소 설교 목적으로 독일어를 쓰게 된 것이며 그 이전에 모든 지적 사상은 라틴어로 쓰였다. 도미니코회 첫 세대의 업적이 무엇이었든(그것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차세대에 속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에서 유럽의 평민 언어로 된 수준 높은 철학적 신학적 논의의 상당량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초유의 환경으로 기록될 텐데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의 뛰어난 철학과 신학 전통의 비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참말로 에크하르트에게는, 수 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어지는 뚜렷히 독일적인 철학적 사상을 가진 학파들을 가리키는 많은 것들이 있다. 에크하르트와 독일 도미니코회 학파를 특징짓는 지성과 인간 정신의 탁월함은, 19세기 독일 관념론의 예표이며,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자기 생각을 전하기 위해 의지했던 언어의 수사학적 재료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나 마틴 하이데거와 같은 현대 독일 사상가를 연상시킨다.

둘째로 에크하르트 신학은 그리스 사상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합을 성취하려는 중세의 위대한 노력의 하나로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토머스 아퀴나스의 경우 그리스 전통을 전한 사람은 새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에크하르트의 경우 프로클루스는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물려받은 철학적 유산을 제공한 것은 신플라톤주의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로클루스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안에서 신플라톤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이 우연히 일치하는 일은 더더구나 선구적 현대 사상가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다. 현대의 이러한 반응으로 해서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에크하르트 작품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피조물의 허무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동양종교 및 자신의 비관주의와의 유사점을 본 한편 헤겔은 철학과 종교의 종합을 제기한 에크하르트의 그러한 점에 흥미를 느꼈다. 20세기에 이러한 관심은 에른스트 블로흐에서 마틴 하이데거(그는 에크하르트의 '초탈'이란 말을 광범위하고도 표나게 사용했다)와 자크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철학계가 존재, 영혼 및 부정성과 같은 주제를 에크하르트가 다룬 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면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그에게서 초월 체험에 대한 감각에 기반한 종교의 강력한 변호를 발견했다. 그는 또 신학 용어의 부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던 것으로 여겨져 신선하고도 도전적인 방법으로 고전 종교의 주제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도든 아니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은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에서 '언어를 뛰어 넘는 신'이라고 하는 아주 낯선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한 스승의 말을 듣기 위해 중세 독일의 교회와 수도원에 모였던 사람들을 한때 감동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스타일의 따사로움, 심오한 사고방식 및 영적 비전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