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중을 잡아라(允執厥中)

목운 2019. 7. 14. 07:35

제가 경전을 인용해서 풀면 꼭 어렵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지배와 통제를 통해서 독점적으로 권세를 누린 자들이 어렵게 느껴지도록 해왔을 뿐 아니라 거짓과 왜곡을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가르침도 예수께서는 가장 당대인들이 알기 쉽게 말하셨고 수시로 간략한 요약 및 해석을 덧붙이셨지만 후대인들이 교묘한 장난을 쳐서 복잡하게 만든 측면이 농후합니다.

대표적으로 중용에서 '중'이 천하지대본이라 했으면 그것을 쉽게 풀고 실천방법을 전수했어야지 이것을 바꾸어서 대중을 향해 '농자 천하지대본'으로 바꿔 써먹습니다. 농업사회에서 '농'이라 하면 바로 생산력이고 생산력이 세상의 근본이라 풀면 뭐가 떠오릅니까? 그것이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유물주의고 어쩌면 조선이 망한 것은 오늘날 소비에트연방이 망한 이유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유물주의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경영학의 '이요인론'만 알아도 이해됩니다. 아무리 물적 조건을 갖춰줘도 사기를 올리는 요인은 물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게 이요인론의 요지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대승불교와 똑같으니 예수께서 요약한 신애와 인인애 실천이 핵심중 핵심입니다. 그리고 대승 정신에서 벗어나는 게 전혀 없는 중용과 주역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중을 잡고 그것을 세상에서 구현하라(和)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을 잡는 실천방법이 제가 앞서 써놓았지만 '생각없이 행함없이 고요함에 머물러 우주와 소통하는(感而遂通天下)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매일 일정시간 홀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소리를 못하는 게 오늘날 동서 모든 교육기관의 허점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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