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6장 - 선악의 대립

목운 2017. 4. 9. 07:31

선악의 대립

심판주의가 인간 심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아무리 애써봐도 그것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기 때문에 난공불략이 될 수 있다. 선악 이분법은 유아기 초기에 주입되어 일생을 통해 강화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그저 '바람'과 '바라지 않음'이라는 감정적 색채를 띠고 표현된다. 이런 식으로 바람직한 것은 '좋은 것'이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과 '불쾌한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이것이 도덕 및 행동 기준의 기반이 되는데 서로 다른 사회부문과 문화에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그러나 이분법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근원적이며 동물집단의 행동에서도 목격된다.


이원성은 포상이나 징벌로 강화되는데 상벌은 만족이나 실망으로 내면화되며 자존심의 확대나 추락으로 귀결한다. 도덕이 성립하는 과정은 인간 사회에 내재적이며 이미 언급했듯이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 과정은 인간 뇌의 신경구조와 생리에 고착될 확률이 커진다(Gazzaniga, 2005; Ackerman, 2006). 


가장 원초적인 생명체는 외부에서 필요한 에너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생존하거나 사멸했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 성공 대 실패, 선악 및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하는 것은 유기체가 타고난 것이다. 동물계의 집단 행동은 인간 행동과 거의 같은데 그것은 생존, 영토확장 및 지배력(헤게모니)을 위한 국가간 권력 투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골치아픈 '선악' 이분법은 모든 사물과 사람이 그저 있는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실로 아주 간단히 초월할 수 있다. 즉 사람은 그저 어떤 순간에 도달된 상태이며 있는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도덕적 분류는 '무엇무엇일 수도 있다'는 가설적 견해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다. 사람이 실제 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가설적이란 것은 기초적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상적인 그림일 뿐 언제나 헛된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거짓으로 측정된다.


유효한 선택지는,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스런 말이 입증하듯이 지배적인 확률 범위에 의존한다. 내면에서건 외면에서건 나이나 환경이 달랐다면 다른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의 그 사람이 실수했던 때 존재한 그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은 죄책과 자책을 줄여준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반드시 카르마상 책임이나 결과를 제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질책을 경감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타인이, 실체에 관한 나의 해석과 기준, 도덕과 행위규범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해로운 일이 된다. 투사된 도덕주의는 언제나 '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종종 원망, 증오, 원한이나 심지어 보복과 전쟁으로 이어진다(예, 철없는 미국인은 다른 모든 나라가 민주정이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서 습관적으로 이분법적 판단에 빠질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 결과 내적으로 커다란 평화가 온다. 


국제관계와 정치에서는 한사람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세계관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종종 무시된다.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면 자비심이 일어난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세상이나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그 사람들에게 반대함으로써 잘못됐다고 판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다"(Richmond,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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