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6장 - 상대주의(2)

목운 2015. 10. 1. 18:43

이상의 모든 것은, 학계를 심각하게 타락시킨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정치적-철학적 표현물에 들어간다(Horowitz, 2006, 2007). (마르쿠제가 제안한 바) 교화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다. '사회 정의' (측정치 180)를 통해 초등학생을 교화시키는 데 사용되는 '급진 수학'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Stern, 2007). 플린(2004년)이 지적 저능아(지수 450)라는 저술에서 이 현상을 아주 잘 묘사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학생들을 마르쿠제의 잘못된 철학으로 교화시키는 대부분의 교수가, 최근 10년간 사회학 저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음에도 (책 제목에 맞게도) 마르쿠제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학계의 의식 수준이 전의 440에서 현재 180으로 극심하게 하락한 것은 미국과 서구 문명에 재앙적이다. 한 유명한 법학 대학원은 440에서 175까지 떨어졌다. 교육의 목표가 굴절되어 이제 정치적 교화(예, 인종, 성, 계급, '사회 정의')를 통한 '감성 훈련'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소규모 지방 대학이, 유명하고 권위 있는 동부 대학들보다 훨씬 높게(440) 측정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들은,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위협이 상대주의(옹호자)와 이슬람 지상주의를 조합한 데 있다는 베네딕트 교종의 관찰을 확인해준다. 이렇듯 상대주의는 자유의 적이 자유의 옹호자라는 양의 옷을 하고 숨어 있는 트로이 목마와 같다. 반마르크스주의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하여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의 이름을 제거함으로써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 학파는 원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으로 불리었으나 정치적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이름 속에 숨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한 속임수에 의해서 (130으로 측정되는 무신론적 변증법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적 본질이 정치적 공격에서 살아남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르쿠제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삶의 거의 모든 면을 정치화하여 그것을 고집하는 것을 영악하게도 '올바르다'거나 '선택받은' 것으로 부른다. 물론 '우수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떠벌림이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에 굉장히 유혹적이다. 그래서 그 삶이 주로 자기애적 기반을 가지는 명사들이 미디어의 매혹에 의해 마르쿠제의 전제 안에 존재하는 에고 중심성에 심하게 끌려,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대의'에 대한 옹호자가 되었다. 혁명은 매혹적이고 정서적으로 사람을 사로잡으며 '고귀한 대의'가 대변인이 될만한 명사를 사로잡는다. '안티' 행진과 시위는 경찰에 대한 투석과 바리케이드 공격과 함께 군중을 끌어들인다. 공산주의는 이미 '자발적' 시위를 전개하는 기법을 완성하여 더욱 향상된 기술로 베트남전 동안과 그 후에도 그것을 실천했다. 약간의 돈만 있으면 항거하는 불평불만자인 대중을, 미국이나 유럽이라면 거의 어디에서나 일상적으로 모을 수가 있다(예, 국제 '정상' 회담때마다).


전통적 지혜와 그 지적 기반이 이제는 '구닥다리'요 시대에 뒤진 것으로 여겨지고 이념적 사이비 지식인이자 야심많은 좌파 학자들이 '우세한' 지적 '포스트모던' 지식을 전파하는 데 재빨리 편승하였다. 전에 권위 있던 우수 대학의 총학장들이 이제는 보통 의식 수준 190으로 측정되며 커리큘럼의 진리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다. 교수가 권위주의적 자리가 되어 하나의 권력으로 여겨진다. '관용', '사회 정의', '다문화주의', '포용' 등의 말로써 주요 대학이 거짓된 주제(예, 9/11 음모론이나 유대인 학살이 "없었다"는 등)에 대한 강의를 하도록 유행을 타는 '교수'를 초빙하곤 한다. 대학의 지적 타락은 일단의 손꼽히는 포스트모던 교수들에 의하여 획책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임계치인 200 수준을 밑도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