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9장 - 질의와 응답

목운 2017. 4. 27. 13:19

질의와 응답

문 :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장식이 가지는 매력을 제거하면 위에서 제시한 과정이 너무 엄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 : 위에 적은 것들은 깨달음만을 진실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쓴 것입니다. "길은 곧고 좁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위해서뿐 아니라 실용적 편의를 위해서도 분심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에고에 호소하지만 막장으로 이끄는 사기꾼뿐 아니라 영적 환상으로 이루어진 잘못된 신비적, 마술적 영역을 좇느라 수십 년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부주의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히 은밀한 함정을 숨겨놓은 오락거리나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면 '피안'의 것이라는 것은 그 진실 여부를 측정할 수 있으며 추종자와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이익을 취하는 영적 에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초심자인 학인들은 종종 진정한 영적 상태와 초성 현상 및 변성 의식 상태(뉴에이지주의)를 혼동합니다. 따라서 장식품으로 숭배받고 전교하는 식의 보여주기로 유혹하는 미끼를 사용하는 노선의 스승들은 누구든지 의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문 :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것은 고전 불교와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상 오류일 뿐 아니라 지각상 오류이기도 합니다. 신이라는 말이 오해를 부르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학인을 위하여 지혜롭게도 그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불성'이란 참나의 핵심이자 순수한 의식(알아차림)입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내용물과 동일시를 하지 않지만 모든 맥락을 포괄합니다. 또 불교에 대한 학인의 지식은 우선적으로 교육적 목적을 가지며 전통에 의존합니다. '스승'이란 말은 650으로 측정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이들 가운데는 박식하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일시적인 삼매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문 : 고도로 진화한 영적 상태에 대한 당신의 설명이 3인칭으로 되었는데 왜 그렇습니까?

제가 기록한 현상은 독자적인 게 아니며 따라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존재하는 '조건'이나 '상태'라고 했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특정한 '누구'라고 할 게 없습니다. '나' 또는 '너'라는 감각은 특정한 위치나 선형적 특성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그것은 특정 위치, 경계, 시간, 시작이나 끝이 없이 빛나는 하늘과 보다 유사합니다. 그 조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 무언가의 '원인'도 아닙니다. 현상들은 누군가로 인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가 없이 덧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불성)은 그저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언가를 '행하거나' 어딘가로 '가지' 않으며 '기간'이라 할 시간의 흔적도 없습니다. '지금'과 '영원'이 동일합니다.


문 : 영적 노력의 전반적인 맥락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답 :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무주상 보시(selfless service)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신과 이웃을 위해 복무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태생적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고 동화되십시오. 세상이 낡고 못쓰게 되었고 추하다고 여길만한것에 대해서조차 매력과 색다름을 보십시오.


문 : 어떻게 하면 진보에 유익한가요?

답 : 그것은 자연스러운 관심사죠. 선택을 통해서 주의력 있는 습관적 태도를 습득하게 됩니다. 모든 순간 안에 각성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있습니다. 단순히 외양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면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모든 것은 빛나고 새롭든지 낡고 칙칙하든지 간에 정확히 그것이 '있고자 한 바대로' 있습니다. 형용사란 모두 투사된 마음의 꾸밈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부사를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든 게 태생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변화란 일련의 사건을 동사로 연결하려는 관찰자 안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1/10,000초보다 빨리 보면 모든 것은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 : 만약 개인의 정체성을 버리면 무(無)가 되는 게 아닙니까?

답 : 아닙니다. 무라는 환상을 초월하면 총체성(Allness)이 있습니다. 참나는 시작이나 끝이 없이 무한합니다. 참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으며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참나는 소아가 아니라 그 사람의 '궁극적 실체'에 더 가깝습니다. 실상에 있어 사람은 만유, 총체성 및 영원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무'가 되지 않습니다.


'공(空)'의 문제(무[無]인 듯한 것은 850으로 측정됨)는 의식 수준을 넘어서 제18장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공에 대한 오해는 에고의 한 측면인 조건적 사랑(집착)을 신의 자비(이는 신의 근본 성질임)와 혼동함으로써 궁극의 실체인 사랑을 부정한 소치입니다. 


허공이라는 환상을 넘으면 총제적이고 오류에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내비춤과 유사한 완전한 충만이 있습니다. 신성은 원래 '근원'이기 때문에 '오용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성은 그 자체를 스스로 알아보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이 진술은1,000으로 측정됨).


비선형을 넘으면 무인 듯 여겨지는 것이 총체성인데 그것은 무한한 자비인 신성이 계시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핵심이 내비추는 것으로서 권능에 차 있고 관대하며 압도적입니다. 그것은 심오하고 오류에 빠질 수 없으며 스스로 자명하며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세상은 무엇과 비슷합니까?

신성의 본질은 그 존재라는 품성이기도 한 모든 창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빛으로서 방사되고 있습니다. 지속적 발생이 현상으로 목격되는데 그것들은 시간, 인과 혹은 순서가 없이 자동적이고 스스로 진화합니다. 즉 잠재성이 현상으로 구현되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존재의 단일성'으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알려집니다. 만유의 완전성이 절묘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균형과 조화로서 내비추어지는데 그러한 미와 균형과 조화에 의해서, 또 진화하면서 펼쳐짐에 의해서 완전성이 더 큰 완전성으로서 현시됩니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습니다. '지금'도 없고 '그때'도 없습니다. 완전성과 더불어 모든 게 자명하기 때문에 답을 구해야 할 어떠한 질문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19장 및 본문 끝]


하늘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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