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성서

복성서에 대하여

목운 2017. 12. 1. 19:21

※다음은 현대불교뉴스 "심성론의 불유(佛儒) 회통론과 거사들(2008. 9. 23.)"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심성론에 있어 불교와 유가 사상을 결합시킨 양숙(梁肅) 거사의 ‘복성명정론(復性明靜論)’을 계승해 보다 발전시킨 사람은 이고 거사이다. 이고(772~841) 거사는 <복성서(復性書)>를 지어 유명하다. 이고 거사는 자(字)가 습지(習之)이며, 롱서(현재 甘肅省 渭源)사람이다. 거사는 학생시절인 정원(貞元) 9년(793) 9월 주부(州附)에서 공거인사(貢擧人事, 지방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행사)를 시행할 때 양숙 거사와 첫 대면을 했다. 양숙 거사는 이고에 대해 ‘서로 통하는 도가 있다’고 평가해 가르침을 주지만, 아쉽게도 그해 11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2~3개월 짧은 기간 동안 사사는 이고 거사에게 스승인 한유보다도 더욱 깊은 영향을 줬다. 그 후 거사는 양숙 거사를 추모해 <감지기부(感知己賦)>를 지었다. 이후 정원 14년(798), 이고 거사는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고, 낭주(朗州)자사, 예부랑중, 형부시랑 등의 고관을 역임했다. 태화(太和) 9년(835)에 양주(襄州)자사 및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에 임명됐고, 그 임지인 양주에서 생애를 마쳤다. 거사는 딸만 7명 두었고, 외손(外孫)대에서 재상을 3명 배출했다. 


이고 거사의 유불회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대표작 <복성서>이다. <복성서>는 모두 세 편으로 구성됐다. 상편은 성정(性情) 및 성인(聖人)에 대한 총론이고, 중편은 수양하여 성인(聖人)에 이르는 방법을 평론했고, 하편은 사람들에게 수양을 권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전편에 걸쳐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회복할 것을 호소했고, <주역(周易)>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으로 주요 전거를 삼았다. 거사는 이 책에서 정(情)을 버리고 ‘성품을 회복[復性]’하는 것을 취지로 했고, ‘헤아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弗思弗慮]’ 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복성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표면상으로 본다면 이 책은 유전(儒典)을 근거로 해 유가의 용어를 사용하며, 그 목적도 공맹의 도통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깊이 사상 내부로 들어간다면 어렵지 않게 이 책의 사상 및 표현방식이 불교의 불성론(佛性論)과 상당히 접근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성서>의 사상은 선종(禪宗)의 ‘이념(離念)’ ‘무념(無念)’ 나아가 ‘무상(無相)’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송(宋)의 석실조수(石室祖琇) 선사는 <융흥불교편년통론(隆興佛敎編年通論)> 권24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복성서>를 배우는 것은 불경의 개요를 얻는 것이다. 다만 문자를 달리 했을 뿐”이라 말했다. 이고 거사의 사상에 불교가 깊게 스며들었던 원인은 양숙 거사와의 인연뿐 아니라 다양한 선사(禪師)들과의 인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4는 거사가 낭주자사로 있을 때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를 친견해 오도한 내용을 상세하게 전한다. 


거사가 유엄 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선사는 경전을 보며 못 본 체하자, 거사는 “직접 대해 보니 소문에 듣기보다 못하다”며 떠나려 했다. 그때 선사는 “태수는 어찌 귀만 귀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깁니까?”라고 반문하자 거사는 합장하며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선사는 손으로 위와 아래를 가리키며, “알겠습니까?”라고 묻자 거사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사가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거사는 크게 깨닫고는 게송을 하나 읊었다. “몸을 단련해 마치 학의 형상과 같고, 천 그루의 소나무 아래 두 함의 경전을 두고 있네. 내가 와서 도를 물으니 아무런 말이 없고,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네.” 게송을 마치고, 거사는 다시 선사에게 “어떤 것이 계정혜(三學)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빈도(貧道)의 이 처소에는 한가한 살림살이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니 거사가 헤아리지 못했다. 


선사는 “태수는 이 일을 잘 보임(保任)하십시오. 앉을 때는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앉고, 행할 때는 바다 속 깊이 밑바닥에서 행하십시오. 침실 속의 물건은 버리지 않으면 바로 새어나옵니다”라고 설명했다. 선사가 밤에 산을 올라 경행(經行)하다가 홀연히 구름을 헤치고 나타난 달을 보며 크게 웃으니, 예양(澧陽)의 동쪽 구십 리까지 울려 퍼졌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선사에게 찾아와 물으니, 거사가 옆에 있다가 “그윽이 머물 곳을 골라 얻었으니 들에서 당신(약산유엄) 뜻에 맞으리. 평생토록 사람이 와도 맞이하고 전송하는 법이 없는데, 어느 때는 외로운 봉우리 꼭대기에서, 달 아래 구름을 헤치고 한번 크게 웃는다”라는 시를 읊었다. 


<전등록>에 보이는 이 일화로부터 약산 선사는 이미 거사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있음이 짐작된다. 거사와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당주(唐州)의 자옥(紫玉) 선사,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 아호대의(鵝湖大義) 선사 등 동시대의 여러 뛰어난 선사들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복성서>에 보이는 ‘성품의 회복’이란 논리가 선종의 ‘명심견성(明心見性)’의 논리와 유사한 원인이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거사의 반연은 유불회통론에 있어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양숙 거사와 다른 측면이 나타나게 했다. 


이러한 거사의 사상을 후대에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다만 불교로부터 나온 것” “지극한 도리를 설하지만, 불교와 유사할 뿐”이라 비판했다. 그런데 이렇게 선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불교에 심취했던 이고 거사는 당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남북조시대부터 출현한 재회(齋會)가 당대에 와서는 점차 화려하고 성대해짐이 최고조에 달했고, 또한 이로부터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국가경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러한 재회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거사는 불교의 재회를 없애자는 의미인 <거불재(去佛齋)>를 찬술해 재회의 폐단을 비판했다. 이 저술을 세밀히 분석하면, 거사의 의도는 불교 본연을 잊고 지나치게 복록을 탐하는 불교도 비판에 있지 불교 자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복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性) 자리, 정(情) 자리  (0) 2018.08.19
성(性)과 정(情)  (0) 2018.04.08
<하편>  (4) 2016.04.23
5절 삶과 죽음을 논함  (0) 2016.04.19
4절-3  (0) 201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