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기독교의 극복과 성리학

목운 2018. 9. 29. 21:55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상투적인 것 또는 통속적인 것이 되며 누구나 자기식으로 다 안다고 생각하여 제한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하나님'이죠! 그래서 명상에도 이름을 붙이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조선 선비로서 경전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누구나 명상을 했지만 거기에서 불교적 냄새를 찾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요컨대 혼자 있을 때 근신하는 '신기독'과 희로애락이 나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지키는 '수기중'은 성리학적 실천의 핵심이기에 중(中)이 바로 '천하지대본'이 된 것입니다.

성리학은 미신과 마구 영합하고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불교 극복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그와 같은 당나라 말기 지성의 노력은 고려말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향하는 의식의 힘은 언제나 내면으로 향하는 의식을 일시적으로 압도하듯 성리학도 세속화하고 이데올로기로 복무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똑같은 코스를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위 초인이면서 인간을 닮은 인격신 '하나님'이란 이름에 모든 병폐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를 극복하는 노력이 영미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가장 강력한 축이 인도에 있고 대표적 인물이 마하리쉬와 마하라지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분발하고 남북한이 통합하여 지구촌에 그 에너지를 떨칠 즈음엔 성리학이 큰 역할을 하리라고 제 개인적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 성리학의 시조로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분이 바로 당말의 이고 선생입니다. 이고 선생은 주렴계에 의해서 거의 복제되었고 주희가 바로 주렴계를 계승 발전시킨 후 성리학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란 존재상태임  (0) 2018.10.08
논어 학이편  (0) 2018.09.30
조하르와 보살 사상  (0) 2018.09.16
제가 글쓰는 이유  (0) 2018.09.14
유교와 현대 영성 비교  (1) 2018.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