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12

깨어남과 깨달음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삶의 방향을 아버지(존재의 근원에 대한 비유 표현입니다)에게로 되돌리는 것을 깨어남(awakening)으로 보면 아버지에게로 가서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을 복성(復性, self realization)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인용하는 책은 마하리쉬 님의 영성을 보다 깊게 해설한 책입니다. 저자는 마하리쉬 님의 영성이 베단타 전통과 같다고 봅니다. 요컨대 변하는 것, 즉 몸-마음으로 된 우리 존재는 생멸심이어서 진여심이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자명하게 아는 것이 바로 복성이자 깨달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깨어난 다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노력한다는 것은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두 구절을 뽑아 왔습니다. 책은..

요점 중의 요점

우파니샤드란 힌두교 문헌의 종합을 말하며 그 가르침의 끝 또는 정수를 베단타라고 한답니다. 그 가르침의 요점 가운데 요점이 바로 '내가 그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유대교의 야훼가 떠오릅니다. '내가 나다'라는 것이죠. 궁극의 존재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진리에 도달한 자들의 고백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궁극의 존재란 의식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을 공적영지라 했으며 탄허스님에 따르면 거기에 이르는 게 바로 치지(致知)입니다. 다음 문장을 인용하려고 서론을 길게 썼습니다. The whole of Vedanta can be reduced to one simple equation found in the Upanishads: “You are that.” T..

올바른 공부

우리가 진여 또는 참나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요즘 읽는 책의 내용입니다. 대승기신론이 진여심과 생멸문으로 나누어 말하는 깨달음의 전통은 어디에서나 같은 것 같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님도 이 전통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하리쉬 님의 'self inquiry'를 진여 탐구로 번역하는 게 더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위 책을 읽다보니 탐구마저도 달리 번역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문장을 보죠. Ramana defines inquiry as holding the mind on the self, which means keeping your attention on the reflection of the self in a pure mind. [How to at..

마음의 의지처

다음은 갑자기 공허하거나 외로울 때 의지하는 기도지만 결국 굳게 홀로 서고 모든 것에서 자유케 되며 큰 위로를 얻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글의 많은 부분은 제 아이들이 읽고 유익을 얻었으면 하는 목적으로 쓰여집니다.) 이 비결을 일찍 알고 실천했다면 제 삶은 좀더 나은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컨대 나무아미타불의 현대적 번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만트라라고 하는데 그 뜻을 완전히 알고 외우면 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천 년 이상 외운 기도니까 분명 깊은 뜻과 유익한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현대 철학이나 종교 용어로 번역하면 '존재의 근원에 제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또는 '무한한 빛과 생명이신 분께 제 존재와 삶을 맡기옵니다.' 또는 '아..

생사를 벗어난 자유

제가 회두할 때 만난 경구가 '생사를 벗어나려면 탐욕과 애갈을 벗어나라'는 선가귀감의 말씀입니다. 지반묵타와 비데하묵타를 알고나서 느끼는 것은, 그 말들이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생사를 벗어난 경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몸을 가진 동안의 해방을 뜻하는 반면 후자는 몸을 벗어난 때의 해방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나고 죽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두 가르침이 같다고 여겨집니다. 비데하묵타란 '몸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자유'를 뜻하며 죽음이란 것도 믿음이나 개념일 뿐 죽음은 없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의식, 곧 내 참된 정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데하묵타란, 체험이 아니라 지식이며 우리 정체성에 관한 선언입니다. 몸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

단상 2022.11.20

고통 없이 고통 받기

고1때 과제로 낸 독후감으로 우수상을 받았고 어쩌면 그것이 제 인문학적 성향을 결정지었는지도 모릅니다. 1차 대학시험 면접에서는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답했고 2차대학은 비록 상대였지만 전공으로 경제학을 택한 것도 나름 저런 성향에 기인한 것 같습니다. 요즈음 소명으로 삼는 모또가 탄허스님의 향상일로와 더블어 인문제세입니다. 인문학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소양이 국어와 외국어 실력이라는 것은 앞글에서 논했습니다. 인문학 공부에서 얻은 제 결론은 동서 최고 지성들이 탐구한 것은 궁극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20대에 몰입했던 프롬은 사회적 제약에서의 자유와 동시에 정신적 자유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나이 먹으면서 제가 보는 관점은 사회적 제약마저 허상인 동시에 인간 의식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뿐이..

단상 2022.11.19

국영수 교육과 진리 탐구

저는 맹자님의 인작, 천작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맹자님의 저 말씀은 천작을 구하는 공부를 인작 추구에 쓰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자 진리추구의 길잡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에게 국어 및 외국어와 수학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뜻은 세상에서 돈과 권력을 구하는 데 쓰라는 게 아니라 진리를 알아차리고 진리대로 살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국어와 외국어 공부는 경전 이해에 꼭 필요한 것이고 수학 공부는 비과학을 피해가는 데 꼭 필요한 공부입니다. 매일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성현들이 가신 길이 보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편지는 우리 고통의 원인, 즉 자유롭게 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가죽끈과 쇠사슬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오래 읽어온 채근담은 그것을 질곡이라 표현합니다..

단상 2022.11.15

깨달음

체험할 때 체험자 자신에게 체험되는 그것이 진아임을 알 때를 깨달음이라 한다. 깨달음은 무언가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알아짐이다. 사람들은 무언가 영원하고 굉장한 체험을 깨달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깨달음의 다른 말인 지반묵타란 모든 것에서 자유롭되 특히 체험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지반묵타가 바로 진아다. 깨달은 자란 자신이 진아임을 알고, 이원성을 알지 못하는 자를 뜻할 뿐이다. (It is enlightenment when the experiencer realizes that he or she is what is being experienced, i.e., the self. Enlightenment is knowledge, not experience of anything. People erron..

삶의 노선

경제가 전부인 양 근심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리 생존과 생활은 보장돼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심학을 하는 제 경우 일상의 방편은 전적으로 근원에 맡기지만 몸은 세상 프로그램에 맞추어 삽니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직장에서 3년여를 견뎠고 건설현장 경비생활을 두 번 했습니다. 짬이 나서 책을 썼고 정말 뜻하지 않게 동생 매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오늘 나눈 대화는 주거비용에 대한 것인데 별다른 계산 없이 우연히 8년짜리 공공 임대에 들어간 저는 누구 못지 않게 저렴한 주거비용으로 살면서, 가족 단위로는 청년 주택 두 채, 자동차 세 대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위와 같은 노선, 즉 생존과 생활은 근원에 맡기고 오직 영적으로 진보하는 일에 진력코자 하는 결심이 더 강해졌..

단상 2022.11.13

존재상태

음악 방송을 시청하다가 불현듯 드는 생각이 교향곡 실연장에 앉아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존재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동네에서 사는 게 그 사람의 존재상태인가? 우리는 부지중에 자신의 믿음대로 존재상태를 드러내며 삽니다. 제가 공부하는 교재에는 예금잔고나 가족, 사귀는 친구들이 진정한 존재상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참 존재상태란 의식이며 그 의식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가진 몸과 마음은 변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사라져도 선택을 하고 존재를 돌아볼 의식이 있다고 전제하고 사는 길과,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고 전제하고 사는 길이 있으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 거기에 따라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상 2022.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