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 22

논어 학이편

아시는 대로 학이편은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제 언어로 바꾸어봅니다. "배워서 습관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게 기쁨이 되는 것은 그것이 존재의 근원에 맞닿은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이유는, 이 공부가 근본에 이르는 공부이며 그가 내 뜻을 이해하기 때문이고, 그런 벗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있는 증거이기에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정(情, 에고)으로 사는 이들에게 모진 대우를 받을 수도 있으나 그로 인해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지향하는 목표가 향상일로한 끝에 군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진 대우를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내 에고가 옅어지고 나는 향상하는 혜택을 받습니다."

단상 2018.09.30

기독교의 극복과 성리학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상투적인 것 또는 통속적인 것이 되며 누구나 자기식으로 다 안다고 생각하여 제한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하나님'이죠! 그래서 명상에도 이름을 붙이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조선 선비로서 경전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누구나 명상을 했지만 거기에서 불교적 냄새를 찾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요컨대 혼자 있을 때 근신하는 '신기독'과 희로애락이 나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지키는 '수기중'은 성리학적 실천의 핵심이기에 중(中)이 바로 '천하지대본'이 된 것입니다. 성리학은 미신과 마구 영합하고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불교 극복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그와 같은 당나라 말기 지성의 노력은 고려말 이 땅에서 그대로..

단상 2018.09.29

왜 보살이 되어야 하는지

복을 구한다고 하면 구할 게 없는데 무엇을 구하냐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가르침에 의하면 중(中)이나 공(空), 또는 성(性)의 자리는 원만구족하여 이미 모든 것이 있는 것으로 믿어집니다. 기독교나 힌두교 영성에서 말하는 신의 자리로 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불교에서도 말이 끊어진 그 자리를 찾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일체를 부정했고 신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찾을 게 없습니다. 바로 지복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호킨스 박사가 얘기하는 의식지수 600 이상의 상태인데 그때 깨달은 자는 이승과 저승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승에 있는 이유는 주변에서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애덕의 요구에 따라 세상이 요청하는 일을 하게 될 것..

복을 구하는 공부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가 복을 구하는데 왜 잘 안되는 것이며 명료하고 간단한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모든 철학과 종교가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지만 왜 잘 안될까요? 저 자신도 많이 엇나가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을 환갑이 될 무렵 크게 넘어지고 깨달았습니다. 그 답은 홀로 있을 때 근신하고 진실하지 못했고 참마음(中)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참마음을 지켜 거기서 지시하는 대로만 살면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공부하고 그것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생각을 끊고 침묵 속에 머무는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이 일이 몸에 밸 때 신 의식(또는 존재의 근원 또는 부동의 동자)에 일치하게 되며 빈 상태에서 무엇이든 복된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즉..

조하르와 보살 사상

유태인 전승으로서 비전적 교훈, 명상법 등 신비적 가르침의 총체를 카발라라고 하며 그 주요 텍스트가 조하르입니다. 조하르는 모세 오경의 주석 형태를 취하는데 성서 짜깁기, 미드라쉬(유태의 훈고학이라 할 수 있음), 중세 설교와 기타 픽션 및 판타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핵심 주제는 인간과 신적 실체의 상호작용입니다. 조하르에 입문하면서 인상 깊은 두어 가지 적어보려 합니다. 첫째는 조하르 중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열 가지 세피롯이란 무한자의 속성 내지 발현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삼위일체는 신의 세 위(位, persona)가 하나라고 하는 반면 조하르는 십위(十位)가 하나라고 봅니다. 조하르는 이러한 십위가 결국 의식 지도이며 존재의 차원으로 보고 ..

단상 2018.09.16

명상, 침묵

지관문(또는 명상)을 통해 신인합일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입니다. 지루하고 답은 없이 사막을 가는 심정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이블은 그 길이 '곧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승들 말씀을 읽고 그냥 홀로 있는 시간을 자주 내면서 보시-지계-인욕 등 오행에 몰입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쉬지 않고 자신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예, 미륵존여래불, 아미타불, 그리스도 예수 등)을 계속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당신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아지경과 같은 것을 바랍니다. 무아지경은 필연적으로 오고 갑니다. 인간 뇌가 그런 압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순수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고 길게 늘인 무아지경이라면 우리 뇌는 타버..

제가 글쓰는 이유

결국 삶의 선택은 둘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젊었을 때보다 확연해집니다. 하나는 세상을 원만히 살면서 '잘 나가는' 삶이고 또 하나는 세상과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세상에 있지만 그저 세상을 가운처럼 걸친 듯' 사는 삶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한 삶과 깨달은 삶입니다. 제가 스승으로 보는 이들은 후자의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일찍부터 그런 삶을 선택하는 상근기 사람이 희귀한 것도 사실입니다. 보통은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다가 아예 후자에 관심 없이 세상에 몰입하거나 좌절과 고통을 만나 회두하여 깨달음에 관심을 가진다고 봅니다. 스승들은 종교를 만들어 깨달음 대행업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진실로 깨달음을 구하는 삶을 살면 의식주와 상식적인 소망 정도는 덤으로 다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

단상 2018.09.14

신의 사랑 체험과 애덕 실천

보통의 인간 체험에는 '신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에 비교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현존을 깨닫는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나의 눈, 375쪽) -- 그야말로 혼돈과 연막이 가득한 우리 현실에서 위와 같은 주제의 책을 한 권 소개하는 게 아웃사이더 짓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면에 '더 크고 더 강한 무엇'에 대한 열망이 있기에 댓글 달아주시거나 책을 구매하신 분도 계시네요. 과거에는 신 체험이 불가능한 것으로 치고 지상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체험을 사후의 일로 미루거나 포기하고 그저 제도 종교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퉁쳐온 것이 보통입니다. 실상 백 명 정도의 사람이 매일 저와 함께 읽고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에는 모세 말고는 신을..

깨달음의 길

깨달음 상태는 이미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상태가 온전히 드러나도록 허용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은 미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 376쪽) -- 가장 비근한 비유로는 구름이 걷히기만 하면 태양 빛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의 진화와 사회적 적응을 위한 학습 과정에서 빛을 가리는 구름이 덕지덕지 덮여서 도저히 걷혀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깨달음이 어렵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편 수많은 고정관념과 몸이 나라는 세뇌가 (이 두 가지가 바로 아집과 법집임) 구름 걷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는 물론 노자와 공자께서 모두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 판단도 차별도 없이 그저 기쁨의 상태가 되는 데 깨달음의 비..

참된 정체성으로서의 의식

모든 두려움은 자아 정체성(identity)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곧 존재와 생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생존의 근원 또는 자아를, 형상(생각, 느낌, 몸)과 동일시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나의 눈, 369쪽) -- 모두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이 진여문을 말하는 것도 마하리쉬 님이 '나는 누구인가'를 끝없이 물어보라는 것도,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공과 법공을 설하고 있는 것도 모두 같은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두려움과 고통의 근원은 같습니다. 몸을 나라고 여기는 한 고통은 멈추지 않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생각이란 것을 끊기 위한 모든 수행법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간단히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뼈에 사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