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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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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06:59 복성서

생각의 매력은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여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 찬탄하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특별한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한 과장된 평가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겸허한 자세와 배후에 숨겨진 동기를 버리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나의 눈, 143쪽)

--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우리의 애착과 미련이 있습니다. 복성서가 얘기하는 희로애락애오욕, 즉 정(情)이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통틀어서 현대어로 에고라고 부릅니다. 에고가 참나, 즉 복성서 용어로 성(性)이 발현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불려불사(弗慮弗思)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 점은 바로 대승기신론의 노선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에고가 실체라고 믿어 그것을 버리기 꺼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소크라테스는 동굴의 우화를 설했고 금강경은 모든 존재가 몽환포영노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인데 이 출발은 강한 의지와 분명한 결단 없이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시작된 여정도 큰 용기와 믿음, 그리고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려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 결단이 필요한데 그것은 이제까지 삶이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들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매일 10분 이상 침묵 속에 고요히 있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일단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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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8.25 19:33 복성서

주돈이의 통서(通書)는 주희와 이고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희는 주돈이에 대해 평하길 "선생(周惇頤)의 학문은 그 오묘함이『태극도설』하나에 구비되어 있으니, 『통서』에서 말한 것도 모두 이 『태극도설』의 내용이다."라 하는 등 주돈이를 극찬하면서 태극도설을 해설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김용남 님은 주돈이가 이고의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통서의 많은 부분이 복성서의 내용과 일치하거나 흡사하다고 합니다(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159쪽). 이고를 성리학의 개창자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분이 불교와 유교의 핵심을 통합적으로 실천하여 스스로 사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주돈이가 지은 통서의 한 구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노력해서 상근기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가 필요하니 그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혼자일 때 텅비어 있고, 활동할 때 정직하다. 혼자일 때 텅비어 있으면 꿰뚫어보고 꿰뚫어보면 통달한다. 활동할 때 정직하면 투명하고 투명하면 공평하다. 꿰뚫어보아 통달하고 투명하여 공평하면 거의 성인이다."』 (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 「通書」, 聖學) 

여기서 금장태 님의 해설을 가져옵니다. "먼저 마음이 고요할 때 욕심이 없어져 마음을 텅 비우면 거울에 사물을 그대로 비추듯이 사물에 대한 판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곧음이란 이치를 따라 흔들림이나 굽힘이 없이 곧게 나간다는 것이요 주역에서 '공경함으로써 마음 속을 곧게 한다(敬以直內)'는 말처럼 마음을 기울어짐이나 비뚤어짐이 없이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비움과 밝음, 224~225쪽).

저는 이 구절이 중용의 중(中)과 화(和)에 해당한다고 읽었습니다. 홀로 고요히 마음을 텅비워 희로애락이 나기 전 마음 상태, 즉 중(中)을 지키는 것은 정허(靜虛)에 해당하고, 활동할 때 희로애락이 드러나 상황에 딱 맞는(喜怒哀樂之發而皆中節) 것이 화(和)인데 이것은 바로 동직(動直)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논란이 될 만한 것은, 금장태 님에 따르면 무욕이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주돈이 이래 주자학자들도 완전한 무욕을 얘기한 게 아니라 마음을 완전히 다스리는 경지를 말했다고 하면서 그 다스림은 경(敬)의 실천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위 책, 226쪽). 통속적으로 생각할 때 무욕하면 무능할 것이 우려되는데 실상 명상(敬은 사실상 명상을 말합니다.)의 소득은 무집착과 지혜입니다. 그래서 위 통서 번역에서 저는 '정허즉명(靜虛則明)'을 텅비어 있으면 꿰뚫어본다고 했습니다. 

위 통서 내용은 인간으로서 최상의 존재 상태로 가는데 꼭 필요한 것을 중용의 노선을 따라 재론한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홀로 고요히 있을 때는 신 의식, 참나, 진아, 진여 등(모두 궁극의 실재에 대한 표현임)과 하나가 되어 밝고 투명하며 지혜롭게 됨과 동시에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때까지 의식이 향상하고, 깨어 활동할 때는 지혜를 발휘하여 그 무엇에도 속아넘어가지 않으면서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성인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만하며 인간으로서 목표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최근 사숙하는 그리스도의 편지 내용과 충분히 조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참고삼아 해당 글을 가져옵니다. 비교해서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 의식에 맞추고 자아를 완전히 다스리는 것이 사는 이유가 되고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도록 하라. 그것을 이루면 바라던 모든 것이 '새롭고 초월적이며 영원한 방법으로' 너희 것이 될 것이다. (Attunement with Divine Consciousness and total self-mastery should be your reason for living, and your only goal. When you have achieved it, all you have ever wanted for yourself will be yours – in a new, transcendent and eternal way. '그리스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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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8.24 07:40 복성서

복성서를 통해서 유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가 하나로 꿰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탄허록과 금장태 님의 동양고전 입문서 '비움과 밝음'을 통해서 그것을 더더욱 확인하였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성품(性)이 내 마음(心) 속에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내 성품(人性)이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점에서는 하늘의 성품(天性)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 속에 있는 마음과 내 위에 나를 넘어서 존재하는 하늘이 상하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요,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성품이다. 길이 끊어졌으면 건너갈 수가 없으니 그 길을 잘 찾아내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비움과 밝음, 76쪽)"

이 해설은 맹자 진심상을 소개하면서 붙인 것입니다. 진심상에는 마음을 철저히 파면 성품(불가의 진여로 보면 좋습니다.)을 알고 성품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고 합니다. 그러니 성품을 키우는 것은 하늘을 섬기기 위함(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진여를 알아 하늘을 섬기는 데 전심전력하기보다는 잇속이 지배하는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거기에 휩쓸려 길이 끊어진 채로 살게 됩니다. 제 경우도 직장 생활 후반기와 은퇴후 약 3년간 그랬습니다. 약 5년 전심전력 노력해서 끊어진 길을 어느 정도 복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나 천주교나 하늘을 섬기는 게 삶의 목표인 줄은 알아서 껍데기만 남긴 것이 제사라는 점에서 같습니다(천주교의 미사는 제사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제대로 섬기는 길은 내면의 진여(性)를 확실히 만나서 매사 진여와 상의해서 처리하고 의식을 더욱 향상함으로써(存其心養其性) 기쁨과 평화를 항구하게 누리는 데 있다고 봅니다.

하늘의 뜻은 우리가 완벽하게 기쁘고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본 중의 기본인, 일이 없을 때 무조건 고요히 앉아 마음을 지키는 것(無事則靜坐存心)을 실천해야 합니다. 참고로 중용 1장은 끊어진 길을 보수하는 것이 바로 수도(修道)고 이때 도가 바로 성품(진여)에 순종하는 것(率性)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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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8.23 09:20 단상
오늘은 호킨스 박사 글 하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지배층은 청교도 윤리로 사회를 통제함으로써 부와 신분을 확보했다."

-- 여기서 청교도 윤리를 넓게 해석해서 대체로 권선징악과 상선벌악을 핵으로 하는 근본주의 종교를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대개 2세기 전후에 페르시아 군사도로 양 끝에서 메시아 사상과 미륵 사상으로 대표되는 구세 사상이 기독교와 불교의 핵심 사상이 되었습니다.

불교만 보자면 선비족이 중국을 다스리기 위한 이념도구로 왕즉불 사상을 주입함으로써 지배도구로 되었습니다. 그 유적이 대규모 석굴로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석굴암이 그 일환입니다. 이러한 이념도구가 인류 발전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지만 어언 15세기 이상 지나는 동안 한계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상선벌악하는 외부의 권위란 지배층이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것인 동시에 진리에 어긋난다는 점이 각 종교의 신비주의에 담겨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 심판하는 절대자라는 교리는 오류인 반면 시공을 초월한 신의 능력을 분여받은 인간이 자신의 사언행위로 지은 결과를 체험할 뿐이라는 깨달음이 각 종교 전통에서 비주류 또는 이단 취급을 받으며 공존해온 것입니다.

결론을 서두르자면 오늘날 로마 교회의 극에 이른 성추문과 한국 불교와 개신교의 부패를 볼 때 이념 도구로서 종교는 자연사할 것이 분명하며 전지구적인 과학 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의 자연적 귀결로서 의식이 전부이며 의식만이 창조하고 선악가부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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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2 07:14 공부의 요령과 요점
동아시아의 사상 또는 학문이란 결국 이곳에 살던 이들이 이승의 고통을 벗어나면서도 세상의 경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추구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이곳에서 발흥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와 유교에 불교가 더해지면서 통합적인 답을 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답을 쉽게 풀면 '규칙적으로 정좌하여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고 거기서 자명하게 얻어지는 매 순간의 실천방안을 세상에 펼치자'쯤 되는데 이렇게 말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제 쓴 것처럼 쓰면 어려워서 모르겠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짧은 공부지만 나름대로 근거를 밝혀가며 쓰는 이유는 동아시아 지성인이 수천년간 실천한 것이 같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분이라도 학우를 얻으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 큰 기여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비슷한 결론을 조금 바꾸어 써보겠습니다.

우리 삶에서 성공의 토대는 신인합일을 이루는 데 있으며 그러기 위해 실천적으로는 모든 일에서 최우선적으로 존재의 근원(또는 제1원인, 신 의식, 불성)을 만나야 합니다. 이 경지는 반드시 규칙적인 명상과 자명한 선택을 꾸준히 함(대승의 지관문)으로써 실천되고 성취될 수 있습니다.

한편 지관문을 포함한 오행(6바라밀)의 실천 동력 내지 인센티브는 외력이나 에고의 분발 기타 세상의 인센티브가 아니라 신 의식 쪽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어떤 얼벗이 이것을 무한 반복하냐고 묻는데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에 있는 천국을 이곳에서부터 누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비결이라고 봅니다.

저는 유불선뿐 아니라 기독교 텍스트가 이 점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세부 사항과 표현방법은 무수히 다양하다고 봅니다. 특히 역경(주역)의 실천은 매 순간 변화하는 사물을 만날 때마다 신 의식께 묻고 청하며 자명한 선택을 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의식을 변화시키고 내 의식에서부터 새로운 창조를 꾀하는 노력이 바깥 현상을 바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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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07:25 공부의 요령과 요점

아시는 분도 계시지만 엊그제 거론한 서경 16자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죠! 저는 한 됫박 구슬밖에 모으지 못했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꿰어야 하는지(一以貫之) 감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탄허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승을 사숙한 덕입니다.

서경 16자구란 '사람 마음은 위태하고 참마음은 미력하다. 갈고 닦으면 하나일 뿐이니 집중하여 그 속을 꽉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또 실천력이 약해집니다. 우리말에서도 심중, 궁중 할 때 중은 깊은 속을 말합니다.

사람 마음에서 깊은 속이란,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도심(참마음으로 해도 좋을 것입니다)으로 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용은 희로애락이 나오기 전의 상태를 중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중용이 중을 천하의 근본이라고 보는 것은 여기에 삶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깊은 속에 있는 참마음은 반드시 홀로 고요히 있을 때만 겨우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기독은 이 중을 지키는 데 있으며 우리 깊은 속에 자리하는 도심(참마음)을 꽉 잡고 있을 때 모든 행운과 불운에서 초탈하여 고통을 면할 수 있다는 교훈이 바로 새옹지마 이야기입니다. 새옹지마는 순전히 세속적으로 해석해도 잘 통하지만 중을 잡은 자는 세상사를 그저 몽환포영으로 보기 때문에 세상사에 결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면 더 좋습니다.

중을 꽉 잡았으면 언제나 그 상태에서 세상사를 처리하는 것이 화(和)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동아시아 최고의 처세서인 채근담을 꿰고 있으며 동학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을 어제 박길수 님 담벼락에서 알았습니다. 인용하자면 '일이 있으면 이치로써 처리하고 일이 없으면 고요히 앉아 참마음을 지킨다(有事則以理應事 無事則靜坐存心, 해월 최시형)'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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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9 07:39 복성서

성인은 모든 것이 성(性)의 마음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쓰기에 불성이니 신성이니 한다. 반면 범부는 모든 현상적 존재가 성의 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고 쓰기에 인간성이라 한다. 이 둘의 차이점은 성인은 성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것이고 범부는 정(情)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데 있다(탄허록 115쪽).

-- 호킨스 요약집이라 할 수 있는 'Dissolving the Ego, Realizing the Self'를 번역하다가 이 제목이 멸정복성(滅情復性)을 얘기한 이고 선생의 복성서와 같네 하는 지점에서 어떻게든 복성서를 번역하자고, 부족한 소양으로 1년 가까이 씨름했습니다. 다행히 중국어 해설이 있어 번역을 마치고 나니 김용남이란 분이 복성서에 대한 박사논문을 두 권의 책으로 낸 것을 알았습니다.

위 두 권의 책을 포함하여 복성서에 대한 해설들을 읽어보면 성이란 대승기신론의 심진여, 정이란 심생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을 붙잡은 지 100일이 지난 것 같습니다. 이제 도달한 결론은 극기복례, 멸정복성, 거비정화가 모두 성의 자리에서 삶이라는 것을 잘 써서 화엄경의 이상인 향상일로의 길을 가자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의 자리가 바이블이 얘기하는 '내 안에 있는 천국'이며 이 천국을 먼저 누리는 것이 피안으로 가는 뗏목을 얻는 것입니다.

2세기에 저술된 대승기신론은 인간 마음에 대한 가장 정통하고 확실한 이론이기 때문에 7~8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지성 가운데 한 분인 원효께서 해설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대승기신론 소와 별기'로서 중앙아시아와 일본에까지 읽힌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지관문(사마타+위파사나)을 포함한 5행(6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성의 자리에서 마음을 쓰는 올바른 길이라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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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07:00 단상

삼강령 팔조목 중에 치지(致知)의 '지'자가 근본인데 이것은 망상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일어나기 전 본래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탄허록, 80쪽)

-- 대학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 따라 학파 내지 당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냐, 고요히 침잠한 가운데 영감 또는 직감을 떠올려서 아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고 선생과 탄허스님은 후자이고 주희는 전자에 가까와 보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주희가 명상, 즉 거경의 삶을 실천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성도 우리 존재 근본에 새겨진 로고스를 찾는 도구라고 보면 결국 같은 결론과 실천에 도달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다만 탄허스님이 우려하는 바, 바깥 세상의 이치에 치우친 망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앎에 이르지 못한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무엇보다 격물하여 앎에 이른다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일이 생겼을 때 판단을 위해 앎을 구한다고 보자는 게 이고 선생의 입장입니다. 격물이란 사물이 다가온다, 또는 일이 생긴다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 가운데 최고 지성들은 일이 없을 때는 사마디(定)에 들어 있다가 일이 생기면 괘를 뽑아 결정을 하거나 몰입해서 일을 처리하신 것으로 압니다.

바깥으로만 달리는 의식을 안으로 돌려(회광반조) 거경하는 삶이 없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구두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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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5 07:01 단상

상근기의 삶이란 대인군자, 즉 우주와 자신을 함께 잊고(物我兩忘) 예(禮)로써 사는 성인의 경지를 말한다(탄허록 78쪽).

-- 탄허스님에 따르면 예란 천리(天理)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형식주의를 지탱하는 고급 영성을 모르면 바로 형식의 괴물에 농락당합니다. 조선의 유학도 영성을 빌어 가문의 재물 지키기로 사용한 도적질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영성을 빌어 비벨탑을 쌓는 일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그 극단에 명성교회가 있는 것이고요...

하여튼 천리에 따라 사는 삶의 전제 조건은 나와 세상을 잊으라는 것인데 어제 쓴 바의 거경의 삶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항상 깨어 '생각이 끊어진 자리(中)'와 하나가 되는 노력이 바로 '속을 지키는 것(守其中)'이며 그때 비로소 도와 명덕(明德)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도와 명덕의 자리가 요새 말로 하면 궁극의 실재 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중근기와 하근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성인이냐 소인이냐입니다(위 책, 같은 쪽). 우리는 살면서 대개 소인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죄와 죄의식이라는 공포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학교나 사회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종교가 소인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우리 스스로 죽어라 노력해서 상근기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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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04:10 단상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도(道)가 없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도는 시공이 끊어져 욕심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 각 분야에서 도를 실천할 때 올바른 정치가 나오는 것이다(탄허록 67쪽)

-- 도에 대한 탄허스님의 간결한 정의가 돋보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끊어졌다는 것은 생멸문에서 벗어나 진여문에 들어간 경지입니다. 즉 명상으로 희로애락이 나오기 전인 중(中)의 상태를 체험하고 6바라밀 또는 4단을 자재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서경의 16구 가운데 나오는 미약한 도심(道心)으로 위태로운 인심(人心)을 극복하였기에 사(私)가 없이 공(公)에 따라 살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이 정도의 기본 교양은 삼국 시대 이래 이 땅을 거쳐간 최고 지성들이 이미 설파하였건만 도에 대한 교육이 끊긴 지 오랩니다. '신기독 수기중'이란 고요히 홀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경(居敬)의 실천을 말합니다.

이때 얻어지는 중이 천하지대본이라고 써 있건만 어설프게 서양 종교를 받아들이고 외면만 흉내내느라 무엇이 긴요한지 다 내버린 셈입니다. 기초과학 없이 응용과학 없듯이 도의교육 없는 학교교육은 무력합니다. 그동안 암기만 능한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듦으로써 성적순으로 심하게 나라를 망치게 만든 것을, 사법부 부패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의 어지러움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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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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