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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운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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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에 해당되는 글 2

  1. 2017.03.28 제13장 - 사회적 생존
  2. 2017.03.28 제13장 - 진리에 대한 반박(2)
2017.03.28 14:31 실체,영성,현대인

사회적 생존

대중성에 힘입은 불성실한 자들의 맹공은 의식 수준이 200 미만인 55%의 미국인이 뜻하는 바이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미국 사람의 전체적 의식 수준은 현재 421(426이었다가 2006년 가을 떨어짐)이다. 이렇게 두드러진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200 미만 수준에는 성실한 사람들의 높은 의식에 존재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 가운데 상대적으로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힘이 매우 강해서 사회의 전반적 생존 능력을 지탱하며 나아가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예를 들면 상위 100명이 미국에서 없어지면 전체 의식 수준은 320으로 떨어진다. 1,000명이 없어지면 그것은 421에서 220으로 떨어진다.)


영적 실체, 도덕성, 성실성 및 진실을 반박하면 문명은 바닥까지 고갈된다. 인류의 전체 의식 지수는 (2007년 11월에) 204인 반면 세계적으로 상위 1,000명을 빼면 그 수준은 겨우 198이 될 것이다.


덜 진보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은 사회를 끝없이 개선하려는 노력을 부추기고 진화상 운이 조금 안 좋은 이들의 부족을 메꾸면서 도움을 준다. 그러니 자비심, 수용 및 관용은 (물론 거기에는 종말론적 이슬람 지상주의[현재 지수 60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측정됨] 같은 사회-정치-종교적 실체에 대한 인식도 포함되어 있음) 실제적으로 사회적 균형과 능률을 지탱해준다.


무신론, 불가지론, 불신(1)

진정한 지적 의심은 의사결정과 믿음을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고려한다는 점에서 성실한 것이다. 이성은 정보에 논리가 가해지면 마음의 처리를 통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지적 처리를 한다. 그로써 (성숙한 선형적 체험과 지혜의 출현에 뒤따르는) 이분법과 의문이 들어선다. 드디어는 지성만으로는 가설적으로 설정된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이 진화의 모든 단계에 동시에 수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앙은 마음의 상수이며 따라서 어디에 신앙을 둘 것인가 하는 것이 유일한 질문이 된다.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은 '올바른 것'을 따른다. 이때 '올바름'이란 지혜에 부합하는 것이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진지한 구도자는 겸손함으로써 마음이 받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서는 진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진실 검증에는 객관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주관적 체험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필요함)는 것을 알게 된다.


영적 실체와 진실을 성의 있게 추구하는 대다수에게는 신앙을 통해 권위에 의지하는 것으로 족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의문에 잠긴다. 그러나 그 해답은, 오늘날 세상에서 의식 측정 방법으로 영적 실체를 검증하는 데 더하여 의식 수준을 초월할 때 이뤄지는 내면의 영적 진화를 주관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조합에 더하여 신에 이르는 길로서 진리에 헌신하면 드디어는 고전적으로 전해지는 커다란 '의심의 장벽' (그 반대편에 깨달음과 계시가 나타난다)을 넘을 수 있다. 모든 의심은 소아(小我)에게서 나오는데 우리가 확실성에서 오는 평화와 더불어 마침내 고향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참나의 압도적인 실체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


마음이 어떤 전제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전제가 오류인 것은 아니다. 마음은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은 무신론자가 빠지는 함정이다. 우리가 그 반대를 입증할 수 없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반증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은 자기가 전능하다고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철없이 가정하며 따라서 고차원의 진리에 도달하는 데 필수적인 겸손을 결하고 있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궁극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의식 측정 기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흥미롭다. 

posted by 목운
2017.03.28 08:08 실체,영성,현대인

진리에 대한 반박(2)

반항적 성격에게는, 진리나 권위가 전제적인 부모의 통제나 다름없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겨진다. 손상된 인격은 온전한 진리를 위협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그것을 거짓이라고 내친다. 


이러한 손상이 사회정치적 관점과 관련하여 낮은 차원이 된 예가 '나'('신경과민') 세대다. 이렇게 부조화한 인격은 자기애로 부푼 '권리'와 쾌락에 다투어 몰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관점은 세속주의적이고 반종교적이며 신과 영적 실체에 반대하는 사회적 관점으로 요란하게 표현된다. 이들은 소위 '포스트모던'의 도덕적 상대주의(지수 160~190)인 철학 시스템 출현(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지원을 받는다. 이어서 에고의 떠벌림은 이러한 일단의 팽창된 에고 중심 관점을 '우수한' 또는 '선발된', '올바른' 것으로 명명함으로써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추세가 학계의 대중주의적이고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언론 자유'라는 것으로 포장되는 미사여구로 지원을 받아 실체 검증상 훼손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러한 편중된 수사(修辭)가 학계로 침투함으로써 오늘날 130이나 심지어 90으로 측정되는 전체 강의에 대해 '관용'을 이유로 하거나 미화를 통해서 대학의 우수성은 크게 떨어졌다. 반권위주의 입장과 그 추종자의 모순은, 그 자체가 적대적이고 악의와 증오에 빠지기 쉬운 데다 초권위주의적이며 강압적인 전제주의라는 점이다. 그에 관련된 감정은 저차원 의식의 끌개장에 기인한 결과이자 그 끌개장의 본질이다. 그 정치적 부산물은 임계 의식 수준인 200 이상과 미만 사람들 간의 충성을 얻기 위한 치열한 투쟁으로 겪은 바 있다.


사회정치적 투쟁에 대한 주 표적은 도덕성 자체에 집중돼 있다. 그리하여 수천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야만적 범죄자를 위하거나, 이슬람 테러리스트(이들 역시 수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를 동정하거나 수천의 고문과 사망에 책임 있는 MS-13 갱단의 '권리'에 대한 옹호자와 후원자가 존재한다.


상대주의의 잘못된 미사여구에 의해 세뇌된 데 따른 실체 검증의 손상의 결과 다음과 같은 기괴한 일들이 생긴다. 즉 어린이를 살해한 소아성애자나 수천 명의 자국민을 죽이고 천정에 달린 줄에 매인 여성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며칠 동안 죽어가도록 함으로써 느린 성적 고문을  즐기는 정신병자 독재자에게 동정심을 표하기 위해 모여드는 연예인들의 사례 말이다.


권위라는 것은 꼭 그 반대 의견을 취할 필요 없이도 부동의(예, 반대)할 수 있는데, 억지로 부동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류 수준으로 떨어지게 한다. 비유하자면 자비란 거짓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는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악을 옹호하는 것은 악에 동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미쳐버린 범죄자가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서 거기에 꼭 동조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영적 실체를 분간하는 능력의 손상은 보통 사람의 순진함에 힘입은 미디어가 끝없이 선전하고 프로그램한 결과인데 보통 사람은 멋지고 유행하는 관점으로 위장된 오류의 왜곡과 과장을 통해서 쉽사리 끌리고 프로그램 당한다.

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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