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목운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Notice

2014.08.06 13:44 실체,영성,현대인

도입 - 개인의 정체성; '자아'

마음은 "내가 나"임을 안다는 점에서만 확실하다. 그러나 '나'라는 게 가리키는 게 무엇인가? 자아라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독특하고 분리되어 있으며 주의력의 초점이지만 또한 타인의 '자아'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들 간의 주된 차이점은 육체적이거나 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추정된다. 차이점은 개인의 호불호, 생각의 근거 또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라거나 그 반대로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Sturme, 2007)?처럼 다른 입장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내적 외적 사건과 체험이 이어짐으로써 뇌의 기억 저장고에 데이타가 쌓여서 '나임'의 감각이, '나'와 '내 마음'으로 여겨지는 시공간 궤도를 따라 외적 사건은 물론 내적 사건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점차 마음은 다양한 의미 차원을 가진 다양한 원천에서 나온 다량의 데이타를 소유하게 된다. 점차 성숙해짐에 따라 행위의 자유도뿐 아니라 책임감이 생겨난다. 이 모든 요인으로부터 선택을 하는 지향과 의지력을 가진 주된 주체이자 체험의 주체로서 주관적 자아란 이미지가 생겨난다. 그것은 동시에 의사결정자이고 선택을 하는 자이며 따라서 의지력을 가진 자이기도 하다.


내면의 자아에서 또 본능적 요구, 지향, 회피거리, 끌리는 것, 소위 '체험'이라는 현상의 주된 자리가 생겨난다. 연이어진 자료처리 과정이 뒤섞이고 결국 마음이 가까운 미래는 물론 과거와 현재, 내면과 외면의 사건을 체험하는 자라고 결론지음에 따라 자아감은 점차 이동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결론짓기를, 자아란 원초적이고 인과를 가지며 독자적이고 개인적이며 타인에게서 분리된, 그러나 타인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복잡한 과정에서 사회적 자아(사람됨)뿐 아니라 개인 그리고 인간 존재 자체의 본성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개인적 정체성이라는 이미지가 생긴다. '나'라는 것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러한 통합된 독자성은, 역사와 이름을 가지고, 또 분리된 몸과 수많은 동물적 본능에 연결된 개인이기도 하지만, 인과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가짐과 동시에 자율에 대한 태생적인 느낌도 있다.


체험의 총체는 추상 용어인 '삶'이란 말로 표현한다. 존재의 바탕은 확실히 생물학적이고 한시적이며 사멸할 운명이어서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와 같은 실존적 난제가 생겨난다. 그러니 개인은 의식 자체와 좀더 추상적 용어인 '영'에 대한 의문에 부딪친다.

posted by 목운
2014.08.04 16:13 실체,영성,현대인

내용과 맥락

맥락은 내용을 포함하는 전반적 장을 말한다. 초목이 연중 계절에 따라 변하듯 맥락은 지배적 조건을 가리키는 반면 내용은 구체적인 것들을 가리킨다. 종종 맥락은 특정되지 않아 모르거나 심지어 그 존재가 의심스럽다. 그래서 (정자에 의한 난자의 수정 같은) 생물학적 현상은 우주선 같은 무중력 상태에서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 최근 알려졌다. 전에는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높은 에너지의 영적 장(예, 성인) 안에서는 치유와 심지어 기적적 현상이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일부 치료사는 치유자이기도 해서 높은 회복률을 보인다. 또 맥락의 장이 가지는 지배적 영향은 심해에 사는 갑각류의 이동 패턴이나 달 주기에 따른 생태 활동(TV 다큐 푸른 지구 [지수 480]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 프로는 창조로서의 진화 과정의 독특한 미학을 잘 잡아내고 있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의도는 이런 식으로 숨겨져 있으나 때로는 결과에 대한 결정적 요인이 된다('하이젠베르크 효과'). 주지하듯 의식-진리의 수준에 대한 간단한 근육 측정조차도 200 이상의 장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에 지향이 더해지면 영적 이해와 발견은 촉진된다. 에고의 의견 대신 진리에 헌신하면 진리는 더 잘 드러난다. 그래서 덕이 있으면 적은 노력으로 더 큰 혜택을 얻으므로 '덕은 그만한 값을 한다.'는 속담이 생긴다. "마음에 있는 것은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는 말도 맥락이란 장의 발현력을 표현한 것이다.


발생을 통한 발현은 이런 식으로 선형적 인과법칙일 뿐 아니라 인간 의식을 포함한 국지적 조건과 전반적 조건에 따른 확률적 현상이기도 하다. 신성의 권능이 무한한 만큼 모든 피조물은 존재 자체가 실체가 되는 잠재력의 지속적인 구현이다. 약한 장에서 하나의 가능성인 것이 강한 장에서는 큰 확률이 되고 무한한 권능(예, 신성)의 장에서는 확실성이 된다.


인간 차원에서 가능성은 '의지'의 표현인데 그것은 동시에 지향의 표현이기도 하다. 보통의 제약은 강한 의지로써 종종 극복되며 이러한 강한 의지는 보이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사전적으로 타고난 (카르마적) 성향에 따른 매우 다양한 결과를 보이는 주요 재난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상위의 참나를 위한 사건은 에고-소아의 소망에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지만 참나의 보이지 않는 고차원 목적에는 기여한다. 인간사는 감전압기와 비슷하게 일련의 과정을 거친 힘의 장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전압처럼 수많은 보이지 않는 요인들의 결과이다. 그래서 신의 은총이 없다면 생명은 모두가 정지해 버릴 것이다(진실 척도 1,000). 


양자 실재 : 의식 연구

다른 곳에서 설명한 대로 뉴턴 차원을 넘으면 의식이라는 무한한 장이 있는데 그 안에는 '여기' 대 '저기'도 없고 '그때' 대 '지금'도 없으며 사건의 선형적 연쇄도 없다. 그것은 전지하며 한번 존재했던 것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 질문이 던져지면 즉시 답이 얻어진다. 실제 존재하는 것만을 물어볼 수 있으나 질문이 던져져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는 실제 질문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인해 확률이 실제로 구현되도록 바뀐다. 이것은 온도가 떨어져 '이슬점'(이슬점은 습도에 의존한다)을 지날 때 이슬이 맺히는 것과 비슷하다.


질문자-관찰자의 의식 수준이 높을수록 '파동함수의 붕괴'(잠재력)가 더 쉽게 이뤄져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의식 측정 방법론의 기초적 작동기제이며 질문자의 의식 수준에 비례해서 그 정확성은 커진다(Jeffrey and Colyer, 2007). [제3장 끝]

posted by 목운
2014.08.04 12:53 실체,영성,현대인

의식 수준 측정치로 보면 과학의 영역이 400대로 측정되는 데 비해 영적 실체는 400대 후반에서 생겨나지만 500대 이상에서만 널리 발생한다. 의식 연구 덕분에 각 진화 수준의 핵심에 내재하는 확고한 에너지를 활용함으로써 이러한 수준들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 반복하자면 1에서 1,000까지 볼 때 200 미만은 거짓, 200 이상은 진실을 가리킨다. 깨달음의 수준은 600에서 1,000까지이며, 1,000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다.


과학과 논리는 '입증 가능', '정의 가능', '객관적인' 등으로 묘사되는 반면 영적 실체는 필수적으로 주관적(체험적)이다. 따라서 사랑, 시사점, 행복, 의미, 유용성, 영감, 기타 질적인 추상 요소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게 지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형 논리나 과학을 통해서 영적 진리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식의 특성 자체(예, 회의주의의 함정)를 포함해서 신성의 실체나 비선형 차원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게 불가능하다.


'과학과 종교'에 부여된 출판물, 조직체와 노력들을 보면 학계 지식인들이 전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거기에 600 이상의 깨달은 사람과 고고한 학자들은 없다. 과학자는 설득하고 '무엇무엇에 관하여 사고하는' 반면 신비가는 자동적으로 깨닫고 이해하고 '그것 자체가 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래서 학계(의식 수준 400대)의 한계와 제약 때문에 고금동서의 매우 영적인 천재와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지수 500~1,000)은 '일인칭 진술'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학자 그룹에서 배척된다. 그러면 참된 영적 정보의 유일한 원천(이것들은 주로 일인칭 보고와 증언으로 된 것임)을 완전히 제거한 '과학과 영성'(모두 400대임)에 관한 학회는 어떻게 열릴 수 있게 되었을까?(번역본 호모 스피리투스 참조) 모순스러운 것은 모든 지적 산물은 그 자체 주관적 마음 작용에 대한 일인칭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형 차원은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반면 비선형은 확인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으며 확신시켜 줄 수 있지만 주로 내재적이고 주관적이다. 비선형은 두 패러다임 간의 커다란 차이 때문에 선형에 지배받지 않으며 선형으로써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대비는 '학술' (지수 440)과 '임상' (지수 445) 과학 간의 분화에 의해서 고전적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전자가 통계적인 지적 과정에 한정된 반면 후자는 의도, 목적의 진실성과 참가자의 측정 지수와 같이 수많은 맥락의 영향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의학에서 숙련된 임상의는 과학뿐 아니라 경험상 효과가 있는(종종 긍정적 결과에 필수적인 비전통적 의료 기법을 포함) 의술과 모든 적합한 의료 기법까지 이용한다. 이리하여 필자의 경우 모든 의학 처방이 듣지 않는 생명을 위협하는 찌르는 듯한 십이지장 암을 단 세 번의 '비과학적인' 침술을 받아 완치한 경험이 있다. 


의학은 예측가능한 것과 통계를 다룬다. 임상은 결과를 다룬다. 그래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성공적인 임상의에게는 필수 조건이지만 의학에서는 측정가능한 요인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임상적 성공과 숙련된 임상의의 경험은 주로 과학에 친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요소는 25년에 걸쳐 미국에서 매우 큰 심리치료 관행에서 볼 때 핵심적 발견이다(Hawkins and Pauling, 1973).


의학이 '비과학적' 이념이나 방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멸시까지 하는 반면, 임상의는 더욱 노련하고 지적으로 겸손하며 따라서 실제 도움이 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널리 인정받는 예로서 단주동맹인데 여기에서는 높은 스펙의 사람들과 유명인을 포함해서 실로 수백만의 아주 가망 없는 이들이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또 수천 명의 의사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영적 기반에 기초한 이러한 회복 사례에 포함되어 있다.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중독 병에서 회복되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조건은 겸손과 더 큰 권능에 승복하는 것이다(Tiebout, 1999). 이리하여 영적 기반의 효력과 효능은 압도적으로 그리고 인상적이게도 분명한 일이다(12 단계 그룹의 측정 수준은 540임).


의식 측정 연구(605로 측정됨)의 가치는 선형 및 비선형 영역과 각 실재에 관한 패러다임을 모두 포괄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두 패러다임 모두에서 확인가능한 가교를 제공함으로써 연결하고 있다. 이러한 연결성은 400대 상위 수준에서 매우 뚜렷한데 그 위로 500대를 거쳐 성인들(570~700)을 포함하는 수준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조로아스터, 붓다, 크리슈나(모두 1,000) 등의 위대한 스승들에 이르는데 이분들은 오랜 세기 동안 인간 삶을 맥락화 하신 분들이다.


400대 의식 수준의 힘은 스타인메츠, 에디슨,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와 프로이드 같은 과학계의 거인들로 예시된다. 유명한 과학자의 측정 수준을 유명한 영적 스승들과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듯이 400대 수준은, 영적 수준이 500대 이상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것을 보여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200 이상의 각 의식 수준은 인간 잠재력의 진보와 성취에 기여한다. 파라오가 건설한 이집트 거대 피라미드는 인간의 노동과 선형 기술로 이루어졌으나 유럽의 대성당들(측정치 700 이상)처럼 실로 영감과 지향이라는 비선형 요인의 결과물이다.


최근 미국에서 지속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이 복음주의 목사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이 미국의 트럭 정류소마다 비치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널리 인기가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 책의 매력은 물론 책의 목적은 의미, 영적 가치와 인생에의 시사점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처럼 사회와 인간 삶의 가치에 크게 기여하려는 데 있다.


과학이 없으면 수백만의 사람이 병으로 죽을 것이다. 영적 가치를 고수하지 않으면 과학적으로 개발된 폭탄과 핵 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수백만이 죽을 것이다. 그래서 신앙 없는 과학은 공허하고 위험하지만 선업(善業) 없는 신앙은 사회적 가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혜는 두 가지를 결합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선형과 비선형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확인가능한 반면 진리는 인류에게 무언의 혜택을 준다. 거짓에 대한 신앙은 역사에서 보는바 끔찍한 전쟁과 또는 오늘날 이슬람 테러에서 보듯 삶이 아니라 '죽음을 숭배하는' 것인데 그 수준은 섬뜩하게도 20으로 측정된다. 과학과 신앙에서 확인 가능한 진리는 행복과 성취는 물론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다.

posted by 목운
2014.08.04 07:58 실체,영성,현대인

패러다임 한계의 문제점 해결

선형과 비선형은 준거점과 패러다임 수준에 있어 전혀 다르다. 공통 언어나 개념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과학은 선형의 관찰 가능하고 정의할 수 있으며 그리고 주로 구조화되고 기계적인 뉴턴 차원(나중에 입자 물리나 양자 역학으로 확장됨)에 한정되며 그와 관련된 변증법적 논리, 이성과 증명가능한 가설(사실들)에 국한한다. 그렇게 태생적이고 내재적인 한계 때문에 과학은 데카르트의 레스 인테르나(코기탄스)레스 엑스테르나(자연 그대로의 실존적 실재) 간의 간격을 이을 수 없었다.


마음은 형이상학, 의미론, 신학, 존재론과 알 수 없는 장벽(하야가와의 유명한 인용인 "지도는 해당 지역이 아니다"라는)을 넘으려는 무모한 관념적 노력을 통하여 자신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그런 치열한 지적 노력은 '그 자리 빛이 그나마 낫기에' 겨우 가로등 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한계는 또 자이곤, 과학과 종교, 과학과 신학, 과학과 의식 리뷰, 의식 연구 저널 및 기타 출판물에 있는 학술적 논술과 설명으로써 아주 뚜렷하게 제시되었다. 그런데 저러한 출판물은 모두 300에서 400대로 측정된다. 이러한 시도들은 루비콘 강을 건너려는 학구적이고 용감한 노력이지만 패러다임 맹점이란 한계로 인하여 뜻한 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간단히 재론하면 비선형은 이해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거나 선형 논리에 해당하지 않는다. 비선형은 서로 다른 언어과 이해 조건을 가진 다른 패러다임이다.


선형 세계는 정의할 수 있고 한정적이며 개념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시간과 공간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선형은 비논리적이고 확산적이며 차원을 초월하며 영향력이 있고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것이다. 비선형적인 영적 실재를 깨닫고 이해하는 것은 신비의 영역이다. 선형 세계가 내용물로 이루어진 반면 영적 영역은 맥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적인 장(場)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그저 시간이나 공간을 전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해 있다.

posted by 목운
2014.08.04 07:57 실체,영성,현대인

맥락을 확장하면 겉보기에 다른 관점 간의 갈등이 해결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이성-과학 대 신앙-종교에도 적용된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영역, 지역, 구역, 넓은 장소 등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 추상적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계, 문, 강, 목, 과, 속, 종으로 함축되는바 존재 수준에 대한 고전적 계층 분류를 가리킨다. 이처럼 패러다임은 포괄범위, 참조 사항과 관점에 관한 전반적 영역을 가리킨다. 


패러다임 맹점

각 사람은 이미 지배적인 의식 수준에 따라 세상과 사건들을 인지하고 체험하고 해석한다. 이것은, 인지된 자료를 심상화하고 합리화된 해석을 통한 마음의 설명 방식에 의해서 더 강화된다. 각 수준은 구체화 과정에서 스스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은 "패러다임 강화"(호킨스 2006)로 아주 잘 묘사된 것 또는 자기만의 지각-체험된 세계가 '실체'라고 하는 확신으로 귀착한다(플라톤이 지적한 바의 프로타고라스의 과오).


그 타고난 구조로 인하여 르네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마음은 본질과 외양 또는 레스 코기탄스(인테르나)와 레스 엑스텐사(엑스테르나)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체험하는 것으로 '실체를 안다'고 하며 따라서 다른 관점은 '틀렸다'는 순진한 가정을 한다. 이 현상 때문에 환상이 생기는데 그 환상은 에고가 심적 과정의 구조로써 의견을 진리와 실제 현실로 잘못 인식하는 데(예 유아론[唯我論])서 나오는 한계의 자동적 귀결이다.


안전하고 싶고 마음으로 굳히고 싶어서 사람들은 동의를 구하고 또 같은 패러다임이나 세계관(예, 블로그 사이트)을 공유하는 타인들과 무리를 이룬다. 또 패러다임은 '차원' 그리고 더 분명히는 '맥락'이나 '전반적 장'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물리를 초월한다'는 뜻인 형이상학에서 철학적으로 거론되는바 즉 마음이 활성 대 비활성, 유기체 대 무기체와 같은 추상과 의미 또는 기본 공통 특성의 범주나 차원을 거기에서 끌어낸다는 점이다. 


맥락은 요건, 세부사항,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조건과 한계 등의 변수를 결정하며 후자들은 추상화 수준을 결정하고 여기에서 의미가 결정되며 그 의미에 따라 가치와 시사점, 유용성이 결정된다.


패러다임은 지향, 기대, 의도에 맞추어지는데 이런 것들은 초기 핵심어나 구절을 도입함으로써 검색 가능성이 있는 범위를 사전에 정하는 인터넷 검색 엔진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런 식으로 패러다임은 가능한 체험이나 발견의 범위를 사전에 결정하며 그래서 보통의 의식은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되는 한 가지 요인이다. 패러다임은 직접 정의하는 일이 드물고 대개는 무시하거나 단순하게 추정한다.


과학에서 인지된 실체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장소(측정)의 차원에 한정될 뿐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정의가능하며 사실에 관련되고 선형적이다. 그 기제는 뉴턴의 인과 개념과 원인-결과의 가정(힘)을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조적으로 사랑, 신앙, 영감이라는 실체와 추상적 진리, 영성 및 종교라는 보이지 않는 기초 가정은 비선형적이며 영향력 있는 의식 에너지 장에 의해서 지배적 계층이 겹쳐지며 하향하는 층위를 사용하는 권력의 원칙을 통해 작동한다. 이것들은 조화를 이루며 "주의적 조합"(Medina, 2006)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는데 한편 의도, 선택 및 결단의 결과이다.


과학은 내용(사실)을 다루는 반면 추상적 실체와 영적 실체는 맥락(진리)을 가리킨다. 과학적 실체에 관한 패러다임은 영적 실체에 관한 패러다임과 아주 다르다. 사실들은 선형적이고 관찰가능하고 입증가능하다. 하지만 진리는 비선형적이지만 확인할 수 있다. 사실들은 한계를 다루지만 진리에는 의미, 시사점, 가치, 유용성이 포함된다.

posted by 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