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격물치지와 회광반조

목운 2018. 8. 18. 07:00

삼강령 팔조목 중에 치지(致知)의 '지'자가 근본인데 이것은 망상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일어나기 전 본래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탄허록, 80쪽)

-- 대학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 따라 학파 내지 당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냐, 고요히 침잠한 가운데 영감 또는 직감을 떠올려서 아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고 선생과 탄허스님은 후자이고 주희는 전자에 가까와 보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주희가 명상, 즉 거경의 삶을 실천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성도 우리 존재 근본에 새겨진 로고스를 찾는 도구라고 보면 결국 같은 결론과 실천에 도달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다만 탄허스님이 우려하는 바, 바깥 세상의 이치에 치우친 망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앎에 이르지 못한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무엇보다 격물하여 앎에 이른다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일이 생겼을 때 판단을 위해 앎을 구한다고 보자는 게 이고 선생의 입장입니다. 격물이란 사물이 다가온다, 또는 일이 생긴다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 가운데 최고 지성들은 일이 없을 때는 사마디(定)에 들어 있다가 일이 생기면 괘를 뽑아 결정을 하거나 몰입해서 일을 처리하신 것으로 압니다.

바깥으로만 달리는 의식을 안으로 돌려(회광반조) 거경하는 삶이 없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구두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교와 현대 영성 비교  (1) 2018.09.06
종교의 자연사  (0) 2018.08.23
상근기의 삶  (0) 2018.08.15
도(道)를 상실함  (0) 2018.08.14
사(私)를 벗어난 경지, 치지(致知)  (1) 2018.08.07